명상/사념처 수행(위빠사사 명상) 각론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해

의산(宜山) 2017. 6. 17. 21:19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이해

 

 

1.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중생들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괴로움이 있다는 것과

어떻게 하면 그 괴로움을 소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르침뿐입니다.

 

그럼 우리가 만나는 괴로움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부처님께서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을 무명과 갈애라고 하셨습니다.

무명은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실체가 없는 것인데도

몸과 마음은 영원히 존재하며, 행복한 것이고나의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는 몸과 마음을 내 것으로 집착하게 합니다.

즉  몸과 마음의 실상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몸과 마음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일으켜 모든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이와 같이 오랫동안 자신을 지배한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선 자신을 있는 그대로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은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한 무지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수행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생긴 지혜로

지금 여기에서 다시 괴로움의 원인이 될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괴로움의 원인을 끊어 괴로움을 소멸하는

사성제의 고귀한 가르침입니다  

 

1. 위빠사나란 어떤 수행인가?

 

지금까지 잘 들어보지 못한 위빠사나라는 용어는 부처님 당시의 언어인 빨리어입니다.

vipassanā 에서 vi'분리하다'라는 뜻이며,  pasanā'직관 통찰'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분리해 놓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을 말합니다.

 

위빠사나는 몸과 마음이라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우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나라는 관념으로부터 분리해서,

그냥 객관적으로 지켜보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상을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경험에 의한 정보를 가지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대상을 놓고 100명이 보면 100개의 견해가 나옵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하는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습니다.

이제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행이란 몸, 느낌, 마음, 이라는 네 가지 대상에 대하여

어떤 군더더기도 붙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지금까지 우리가 ''라고 알고 있던 몸과 마음이

 실제로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은 오온의 수상행 중에서

으로 우리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실제로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마음을 손으로 보내십시오.

현재 손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려보십시오.

이렇게 지켜보면 손에는 따뜻하거나 촉촉한 느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느낌을 지켜보는 순간에는 마음속에 다른 근심걱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근심걱정이 없는 마음은 고요하고, 이런 고요함은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좀더 '있는 그대로 ' 볼 수 있게 하며,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상, , 무아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라고 알고 있던 무명을 깨고, 몸과 마음이 집착할 것이 아님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글이나 말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닌

수행을 통해서 몸과 마음이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실체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면,

점차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견해로 인한 갈애와 집착이 줄어듭니다.

 

그래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그만큼 탐진치를 내는 힘이 줄어들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힘이 생기며

그만큼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괴로움의 원인을 심지 않게 됩니다.

   

2. 위빠사나 수행의 근거가 되는 경전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대념처경이라는 빨리어 경전을 근거로 수행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대념처경 서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꾸루스 지방의 깜마사담마라는 마을에 머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습니다.

비구들은 , 세존이시여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생을 정화하고,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올바른 길에 도달하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길이다.

 이것은 바로 네 가지 알아차림의 확립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느낌에서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마음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하고, 알아차려서, 세상에 대한 욕망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지낸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란 마음의 행위를 해서 자신을 정화하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마지막에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데 수행의 목표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괴로움의 원인을 가르쳐 주시고,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로 팔정도,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를 실천하는 수행자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궁극적인 행복인 열반을 얻어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 열반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있는 그대로 보는 알아차림을 어떻게 할 것인지 입니다.

그래서 이론과 더불어 직접 수행을 하면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가야 합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알아차림의 힘이 쌓이면 실제 생활에서 괴로움이 있을 때 알아차림을 하게 되고,

어떤 괴로움도 법으로 당당히 받아들여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믿음이 생기고, 알아차림을 더욱 열심히 하려는 노력이 생깁니다.

이런 노력은 알아차림을 계속 이어가게 하며,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마음은 집중되고 고요해져 안정됩니다.

이런 안정된 마음에서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가 뒤따릅니다.

즉 수행은 믿음과 노력과 알아차림과 집중과 지혜라는 다섯 요소가 알맞게 균형을 갖출 때 발전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으로 생긴 지혜는 먼저 자신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고,

또 함께 사는 가족과 이웃에게도 그 평온과 행복의 향기가 퍼져나가 나와 남이 모두 함께 행복해집니다.

 

3.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에는 번뇌가 없다

 

그러면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욕망과 고뇌를 버리게 하여 괴로움을 소멸하는 유일한 길인데

어떻게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가 알아봅니다.

 

알아차림이란 몸 느낌 마음 법의 네 가지 알아차릴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반응하지 않고' 알아차리는 행위입니다.

즉 현재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없이,

붙잡거나 없애려하지 않고, 사실대로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편안하고 바른 마음가짐일 때 알아차림이 가능해집니다.

만일 수행자가 어떤 현상을 바라거나, 싫은 대상을 없애려고 알아차림을 하면

그것은 바라는 것이 있는 마음가짐이라서 수행자를 들뜨게 하고 불안하게 하여 알아차림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 알아차림을 어떻게 하는지 실제로 한 번 해 봅시다.

먼저 양 손바닥을 마주 대고. 눈을 살며시 감고 마음을 손바닥에 보냅니다.

그리고 마음을 계속 손바닥에 머물러 있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음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를 알아차립니다.

어떤 느낌을 알게 됩니까?

 따뜻함, 축축함, 단단함, 부드러움, 점차 더워지는 열기, 열기의 변화 등등을 마음이 경험합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몸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하여

 마음이 저절로 알게 되는 느낌들을 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나 지금 경험하는 느낌에 대하여 자신의 고정관념으로 어떤 개념이나 생각들로 사족을 붙이면

알아차림이 아니고 망상입니다그냥 단순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 다시 한 번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고 지금 알고 있는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 봅시다.

지금 경험하는 느낌들이 그대로 있는지, 또는 느낌들이 어떻게 변하는지 얼마동안 그냥 지켜보십시오.

 

, 이제 합장을 푸십시오.

지금 여러분들이 손바닥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알아차리는 동안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나, 괴로움, 불만족이 있었습니까?

무엇을 바라거나 근심 걱정을 했습니까사실 그런 생각들이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오직 알아차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마음에 근심 걱정이 없는 평화로운 순간이며,

마음에 번뇌가 끼어들지 않는 깨끗한 상태가 됩니다.

저절로 계율이 지켜지며, 마음에 걸림이 없고, 마음에 걸림이 없으므로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집니다.

그래서 더욱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집중과 지혜가 생깁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현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동안 괴로움이 없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알아차리는 순간을 만들고 이어가고 늘려가는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알아차림이 이어지는 동안 번뇌가 없기 때문에 괴롭지 않으며,

또한 마음이 안정되니까 바르게 말하고 행동하여 선업을 행할 수 있고,

이런 바른 말과 행동은 좋은 과보를 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행복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금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을,  

그리고 궁극에는 완전한 행복인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하는 붓다의 수행법을 만난 이 인연을 잘 가꾸어서,

나와 남이 모두 함께 행복하고 평온하며, 궁극에는 열반을 성취하길 기원합니다.


2. 알아차림   

 

1. 알아차림의 의미

 

불교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며그 방법은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며,

팔정도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작용을 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불교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입니다.

 

sati라는 말은 vipassanā처럼 빨리어입니다. 이 단어는 기억과 알아차림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기억이라고 하면 지나간 과거를 기억하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현재 이 순간에 대한 기억, 즉 마음이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현재 우리나에서는 사띠를 알아차림, 마음챙김, 주시 등으로 혼용하고 있지만,

한국 명상원에서는 알아차림으로 통일하여 사용합니다.

즉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서 보는 것,

즉 현재에 마음을 두고 지켜보는 것그래서 현재를 놓치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84000법문을 간추리면 37조도품으로 축약되며,

이는 다시 8정도로 축약되고,  8정도는 계. . 3학으로 축약되며,

계정혜 3학은 다시 알아차림 하나로 귀결 됩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알아차림입니다.

 매 순간을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으면번뇌거리가 들어와도 번뇌를 따라가지 않으므로,

지금 여기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될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실천하면,

이것이 바로 괴로움을 소멸하는 8정도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2. 알아차림의 대상

 

위빠사나 수행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알아차림이라는 마음의 힘을 계발하는 것인데,

이때 알아차림의 대상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며,

수행자는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어떤 작용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주시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두고 주시하는 것이며,

또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알아차림이란 할 때 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지금 여기에서 일을 하고 있는 몸과 마음을 깨어서 보는 것이지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때 대상은 실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

즉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대상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재實在는 인식론입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쳐 지금 인식하는 것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존재하는 것을 모두 실재하는 것으로 알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실재로 취급합니다.

 

우리에게 항상 손이 있지만 지금 마음이 어떤 생각을 골몰히 하고 있다면

그 순간 손은 없고, 생각이라는 정신적 현상이 있습니다.

이때는 지금 일어난 생각이 실재하는 것으로 알아차릴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다시 마음이 손을 느낀다면 이때 손의 느낌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실재가 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인식하지 못하는 것,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경험하는 것만이 알아차릴 대상이며,  법이며

이 법에서만 찰나 생멸하며 흐르는 무상, , 무아의 법을 통찰할 수 있습니다.

 

결국 실재에서만 궁극적 성품인 무상, , 무아를 확인할 수 있지,

실재가 아닌 관념에는 무상, , 무아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를 닦는 수행은 지금 일어난 물질적 현상이나 정신적 현상을 대상으로 합니다.  

 

3. 알아차리는 방법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진을 찍을 때 카메라 렌즈가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오듯이,

수행자도 대상을 사실대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여 아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또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영화의 줄거리에 자신의 생각을 개입할 수가 없고,

다만 현재의 스크린에 마음을 두고 그냥 전개 되는대로 영화를 보기만 합니다.

나중에 영화가 다 끝나고 나면 영화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지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이처럼 수행자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영화 보듯이

어떤 개입도 하지 않고 지금 나타나는 현상을 그냥 구경하기만 합니다.

이 말은 현재 자신이 경험하는 현상에 대해 좋고 싫고 하는 분별을 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여 알아차린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매순간 나타나는 실재하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알아차리는 행위가

사띠, 알아차림이며,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입니다.

 

또한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항상 현재로 돌아와 알아차리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려야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길들여온 탐진치의 습성에서 벗어나마음이 현재에 깨어있는 일을 하는

깨끗한 마음의 작용으로, 오온 중에서 행온行蘊에 속합니다.

 

만일 마음이 알아차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마음은 항상 밖으로 나가서

지금 부딪히는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나 싫어하며 탐진치의 습성에 힘을 실어줍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대상을 알아차리느라 대상에 대하여 좋아하거니 싫어할 틈이 없습니다.

 

탐진치는 깨어있지 못하고 자기만의 정보인 느낌과 생각에 휘둘릴 때 일어나는  

해로운 마음의 작용이며알아차림은 깨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유익한 마음의 작용입니다  

 

4.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

 

알아차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수행자에게 원하는 마음성냄슬픔근심걱정이 있다면

그런 마음으로는 알아차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또 억제하지 않고, 무엇이든 나타나는 대로 다 받아들여

차분하게 지켜보는 마음일 때 알아차림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과 노력과 집중의 균형으로 발전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노력이란 힘을 주어 대상을 강하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현재를 알아차리려고 마음을 새로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하면 그만큼 집중이 생깁니다.

 

이런 바른 마음가짐을 갖기 위해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몸과 마음의 상태를 알아차립니다.

우선 몸이 긴장했는지 알아차려서 몸의 긴장을 풀어주고,

마음에도 바라는 것이 있는지 알아차려서 마음의 긴장을 풀고,

그래서 편안해진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나는 대상을 가볍게 부드럽게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편안하게 이어지면

수행자는 몸과 마음이 안정되면서 계속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초보 수행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수행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수행이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탐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힘을 줄이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수행을 하면서 수행이 잘 되길 바라고, 수행이 안 되면 싫어하고,

또한 수행이 잘 되면 아만심을 키웁니다.

수행을 하면서 오히려 탐진치의 성향을 키웁니다.

이것이 수행을 처음 시작하는 수행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입니다.

 

알아차림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의 방식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대상을 만나면 그 순간 일어나는 느낌과 생각에 따라

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버리는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가 시키는 대로 행위를 했다면,

수행은 이 탐진치의 거센 물살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알아차림이라는 새로운 마음의 습관을 만들어가는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탐진치를 벗어나는 수행은 처음에는 잘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이때는 잘 안 되는 것을 알아차려야하는데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잘 안 되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바로 어리석은 마음이 시키는 탐욕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통증이나 망상 졸음 등을 없애려고도 하지 않고, 집중이 잘 되기를 바라지도 않고,

그냥 나타나는 대로 모두 알아차리고 지켜보기만 합니다.

 

수행자는 나타난 현상을 구경할 의무가 있지, 어떤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현재 나타난 대상은 그것이 좋은 것이나 싫은 것이나 간에 다 알아차릴 대상으로 할 뿐입니다.

 

비록 망상이나 통증이나 졸음이라도 나타나는 대로 알아차려주면

이 과정에서 인내하는 힘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갑니다.

그래서 이런 원하지 않는 현상이 바로 수행을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시비선악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이런 판단 분별은 관념이며 망상입니다

그것의 실재는 시비 분별하는 마음이 한 순간 일어났다 사라지는 현상만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현상들은 수행자에게는 오직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5. 수행에서 알아차림이 하는 역할과 이익

 

첫째알아차림은 "안이비설신의" 6군데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보통 육문에 부딪치는 대상을 받아들일 때좋은 것은 탐심으로 싫은 것은 성냄으로 반응합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육문에서 대상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마음의 작용이므로,

 당연히 육문으로 들어오는 탐욕과 성냄을 막아줍니다.

만일 이때 육문에 알아차림이 없다면 그 순간 탐진치가 주인이 되어

계율과 마음의 고요함을 도둑맞고 번뇌에 빠지고 맙니다.

 

둘째알아차림은 불선업을 선업으로 바꾸어줍니다.

 당연히 지금 탐진치가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면즉시 탐진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알아차리는 마음이 일어나서 관용 자애로 선한 말과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없으면 그냥 탐진치가 시키는 대로 불선업이 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순간이 바로 선업을 행하는 순간이 됩니다.

 

셋째알아차림이 있으면 계율을 지키게 되고, 그 결과 마음이 안정되어 정을 만듭니다.

이 상태에서 바른 견해인 지혜가 생기고, 이런 작은 지혜들이 모여서 궁극에는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알아차림이 계정혜 3학의 시작이며, 결국 해탈열반으로 향하는 첫걸음입니다.

 

넷째알아차림은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보게 합니다.

마치 관객이 영화를 그냥 열심히 보면 영화가 끝날 때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수행자가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계속 지켜보면, 몸과 마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게 됩니다.

즉 몸과 마음은 매순간 변하는 무상한 것이고, 집착의 대상으로 괴로움이고,

이것을 조종할 수 있는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는 성품을 통찰하게 됩니다.

 이런 통찰지혜는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그만큼 괴로움도 줄어듭니다  

 

6. 알아차림이 잘 안되는 이유

 

첫째몸과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이 특별한 것이 아니며, 감각적 쾌락을 주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내지 않습니다.

그 바탕에는 알아차리면 무엇이 좋을까 라는 의심이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알아차림을 해보면알아차림 없이 행위를 할 때는 반드시 괴로움이 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하는 일이 결코 시시하거나 무의미한 것이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둘째그동안 살아오면서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본적이 없어서 알아차려야 하는 것을 자꾸 잊어버리고,

또한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바로 나의 몸과 마음으로 집착해서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그러나 놓친 것을 다시 알아차리면 그만큼 알아차리는 힘이 쌓여서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셋째아직 알아차리는 힘은 약하고 탐진치를 일으키는 힘은 강해서

알아차림을 하다가도 대상에 휩쓸려서 알아차림을 놓쳐버립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한 시간 동안에 '한 호흡'만이라도 제대로 알아차려 보아야 합니다.

제대로 알아차린 한 호흡이 두 호흡 세 호흡으로 늘어나면서 알아차리는 힘이 차츰 쌓입니다.


7.  알아차림을 잘하려면

 

첫째알아차림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 "지금 자세는 바른가?" "지금 내 몸이 무엇을 하는가?"

 하고 항상 현재의 몸과 마음으로 주의를 기울여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직접 알아차려야합니다.

 

그리고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마음을 몸에 붙여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알아차리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예를 들면 지금 일어나고, 세수하고, 식사하고, 이야기하며, 걸으며, 앉으며, 운전하며, 집안 일 등을 하면서,

현재의 상황을 자주자주 지켜봅니다.

 

그러다가 이 과정에서 불쑥 일어나는 마음이나 생각이나 느낌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런 과정을 착실하게 닦을 때 알아차리는 힘이 길러지며, 점차 알아차리는 것이 능숙해지면 나중에는

저절로 알아차림이 따라 다니게 됩니다.

 

둘째알아차림을 한 뒤에는 알아차린 대상에 대해서는 "그랬구나"하고 시비是非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아차린 뒤에 알아차렸다고 좋아하거나알아차림을 잘했는지, 못했는지,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이 맞는 것인지, 틀린 것인지, 등등을 생각하며 시비하고 판단 분별하면

이미 그 순간 알아차림을 놓치고 망상에 빠진 것입니다.

 

이미 지나간 현상을 붙잡고 시비를 하면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실대로 '그랬네!' 라고 알고 놓아버리고,

바로 지금 새롭게 나타난 대상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몸과 마음은 계속 조건에 의해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알아차릴 새로운 대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것은 놓아버리고 현재의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까?'하고 그 원인을 알려고 하는 것도

그 순간 망상에 빠진 것으로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셋째알아차림에는 마침표가 없습니다. 알아차림은 항상 이어져야합니다. 알아차릴 대상은 현재라는 시제 속에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현재의 대상을 다시 알아차려서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대상이라도 마음이 과거의 대상에 머물러 있으면 그 대상을 집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침표를 찍고 알아차림을 놓쳤다면 다시 그 상황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현재를 다시 알아차린 순간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과거는 사라지고알아차림을 하는 현재가 있습니다.

아무리 늦은 알아차림이라도 알아차리면 그만입니다.

이미 알아차림을 놓친 과거는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 다시 그것을 붙잡고 아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알아차림이란 티켓을 들고 다녀야 합니다.

이 티켓은 지고의 행복인 열반, 깨달음, 윤회의 종식, 불사不死의 문으로 들어가는 티켓이기 때문입니다.


3.  관념과 실재  

    

1.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지금까지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아주 객관적으로,  마치 남의 일처럼또 관객이 영화 보듯이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데도

관념과 실재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관념은 몸과 마음을 형상모양, 이름 등으로 관념화한 것이며

실재는 몸과 마음에서 지금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관념은 선정수행의 대상이 되고실재하는 느낌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둘 다 알아차릴 수 있는 법이기는 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실재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관념은 세간법이고, 실재하는 느낌은 출세간법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릴 대상은 법이며

이들은 물질의 법과 마음의 법과 마음작용의 법이 있습니다.

법은 모두 81가지로,  81가지 각각의 법은 그 법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이 있고

조건적 특성이 있고, 무상, , 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상무아라는 보편적 특성을 통찰한 결과로

깨달음에 도달하기 때문에 이 법을 궁극적 진리,  빠라마타 담마진제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관념과 실재의 구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자가 관념과 실재의 구분하지 못하면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앉아서

실재가 아닌 관념을 붙잡고 망상을 하면서도 그것을 수행으로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것은 이론을 듣고 사유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점차 구분이 확연해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알아차릴 대상으로서 관념과 실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생활 속에서 관념을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관념과 실재를 구별할 필요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을 하려면

 반드시 관념과 실재에 대하여 개념적으로라도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수행자가 한 대상에 몰입해서 근본 집중 상태로 들어가는 사마타 수행은

관념을 수행 대상으로 하지만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경험하는 느낌을 대상으로,

그 느낌을 분리해서 느낌의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가 수행의 대상이 됩니다.

 

실제로 수행을 할 때는 일차적으로 관념인 모양에 마음을 기울여서 마음이 안정되면,

다시 실재인 느낌에 마음을 기울여서 성품을 보는 위빠사나 수행을 합니다.

그런 결과로 몸과 마음의 고유한 특성, 조건적 특성, 보편적 특성을 볼 수 있게 됩니다.

 

2. 관념

 

빨리어 빤냐띠는 관념입니다관념은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붙여진 세속적 개념이며 .입니다.

그래서 빤냐띠는 세속의 진리, 속제俗諦입니다

, 실재하는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세간에서 사용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  명칭숫자나이여성남성사람동물아름다움추함 등등으로

언어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것은 모두 빤냐띠입니다.

 

예를 들면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의 실재實在는 그 순간의 물질과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지만,

지금 말하고 행동하는 그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아무개사람남자여자, 아름답다추하다옳다그르다 등으로 명칭을 붙입니다.

그러므로 시비 판단 분별하는 것이 모두 다 빤냐띠, 관념입니다.

 

이렇게 관념은 실재를 표현하기 위해 시설된 방편이라서 고정된 것이고 인위적인 것인데우리는

실재를 보지 못하고 그 관념 자체를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시비분별을 일으키며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소멸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관념 속에서 그 관념이 의미하는 실재를 보는 것입니다.

래서 관념을 관념이라고 알뿐, 그 관념에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한다는 것은 그 법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으로,

이것은 느낌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관념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개념입니다.

관념은 이미 박제된 것으로 인식할 고유한 특성이 없는 것입니다.

또 관념은 한 번 생기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세간은 관념의 지배를 받습니다.

 

관념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관념을 대상으로 보는 사마타수행은 몰입이 가능하여

근접 삼매를 거쳐 근본삼매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몰입은 대상과 하나가 되어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아서

초선에서 4선까지의 선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청정도론에는 사마타 수행의 주제 40가지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표상인 이미지. , , 관념, 즉 빤냐띠를 대상으로 하여 근본 집중을 한 결과

색계나 무색계 선정을 얻는 수행 주제입니다  

 

3. 실재

 

빠라마타는 자연적인 것근본법최승의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만 실재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만 실재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직접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법이라고 하며, 빠라마타 담마, 궁극적 진리, 진제眞諦라고 합니다.

 

논장에서는 법을 482법으로 분류합니다.

 빠라마타 담마의 법은 마음, 마음의 작용, , , 물질, 열반이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과 물질의 법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유위법이며,

열반은 원인 결과가 없는 무위법입니다.

 

위빠사나가 빠라마타 담마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몸과 마음에서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실재한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느낌을 통해서 직접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느낌은 매순간 다릅니다. 다시 말하면 느낌은 매순간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대상에 깊게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찰나마다 올라오는 대상과 그 대상을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찰나집중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대상과 아는 마음이 생멸하면서 흐르는 것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없기 때문에 집중이 되면서

고요함이 생기고, 찰나마다 변하는 느낌에서 무상과 괴로움과 무아의 법을 통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처음부터 무상무아를 통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은 마음을 몸에 붙여서 몸의 움직이는 모양을 잡고 마음이 안정되면 몸의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쌓이면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이 원인과 결과로 흐르는 것을 파악하고,

다시 물질과 정신의 변화에서 생멸의 법을 볼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이어서 괴로움과 무아의 법을 보게

된다고 이해해야합니다.

 

수행자가 몸과 마음이 무상무아라고 자주 생각하는 것은 위빠사나의 지혜가 아니고 사유이며,

 이 사유는 탐진치라는 번뇌를 끊는 힘이 없습니다

알아차림으로 직접 무상, , 무아의 성품을 보고 이해할 때 탐진치를 끊어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 결과로 열반을 성취하기 때문에 빠라마타 담마는 궁극적 진리최승의법입니다 

 

4. 실제 수행에서는 관념으로 시작하여 실재를 알아차립니다

 

관념과 실재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 안에는 실재가 들어있습니다.

처음 수행을 시작 하는 단계에서는 모양이 분명하여 잘 잡힙니다.

수행자가 계속 빤냐띠인 모양을 알아차리다보면 마음이 안정되어 점차 느낌인 빠라마타가 인식됩니다.

이때 모양은 작아지고 느낌이 커집니다.

 

그래서 좌선이나 경행을 할 때 먼저 대상을 잘 잡을 수 있도록 모양에 마음을 기울이다가

집중이 되면 점차 모양에서 느낌 쪽으로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때부터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빠라마타에 집중하면 빤냐띠는 사라지고 오직 실재하는 성품만 남습니다.

신념처에서 호흡을 볼 때 배의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주 대상으로 보는 것은

마음을 호흡에 집중하기 위한 도입부분이고,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이 되면

배의 모양은 사라지고 수축 팽창하는 느낌이 커집니다그러면 그 느낌을 대상으로

느낌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경행에서 발을 알아차릴 때,  발이 움직이는 모양을 대상으로 하면 빤냐띠를 보는 것이며,

 발의 움직임에서 무겁고 가벼운 느낌을 보면 실재하는 성품인 빠라마타를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손을 합장하면서손의 모양을 보면 그것은 빤냐띠를 본 것이지만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하는 빠라마타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식사할 때 고추를 먹으면서 고추다맵다라고 생각하면 대상의 명칭, 관념을 본 것이며,

지금 혀에서 느끼는 고추의 매운 맛의 변화를 알아차리면

고추라는 물질의 고유한 특성인 매운 맛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좌선 중 호흡을 볼 때도 배가 일어나고 꺼지는 모양을 알아차리거나

일어남꺼짐 하면서 명칭을 붙이면 빤냐띠를 보는 것이며

그 뒤 마음이 호흡에 잘 집중되어 호흡의 밀고 당기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호흡의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염불,  화두 같은 수행은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이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면

실재가 대상이므로 위빠사나 수행이 됩니다.

이와 같이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은 하나의 대상에서 대상의 모양을 보면서

근본 집중을 하는가,  대상의 느낌을 보면서 찰나 집중을 하는가에 따라 구별됩니다.

 

세간에서는 빤냐띠와 빠라마타를 구분하지 못하고빤냐띠가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모양과 명칭 또는 명분에 가치를 두고 모양을 갖추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계속 윤회하는 세속의 진리속제이며 관념적 진리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을 향하는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모양보다는 실재를 더 중요시합니다.

 모양, 관념,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단지 빤냐띠, 관념이라고 알뿐,

그 모양이 의미하는 실재에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모양, 명칭, 명분이라는 관념의 그물에 걸리지 않습니다.

 

모든 관념 중 가장 괴로움을 주는 관념은 오온을 라고 알고 있는 관념입니다.

 ‘라는 이름에서 그 실재인 오온의 법을 보지 못하여,  ‘를 실재인양 착각하고

 를 집착을 하여 괴로움을 생산합니다.

 

만약 여름에 모기에게 물렸을 때모기가 나를 물었다고 생각하면

즉시 모기와 연결된 다른 생각들이 일어나 결국 짜증을 내거나 근심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자기 생각에 빠져 실재를 놓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실재하는 것은 따끔거림가려움 등의 느낌이며그 느낌도 매순간 변하면서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차리는 동안 모기라는 이름 때문에 괴로워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현재의 따끔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해충이라는 관념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모기로 인해 손해를 보았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물린 곳의 느낌을 알아차려 느낌의 변화를 보고 느낌의 생멸하는 성품을 봅니다.

 

수행을 시작하면 처음에는 이것이 관념인지 실재인지 구별할 수도 없고

 바로 관념에 빠져 망상만 합니다이럴 때 자신이 관념에 빠진 것을 알아차리고

즉시 실재하는 몸의 느낌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수없이 거쳐야합니다.

 

이 과정에서 점차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는 힘이 생겨서 지금 경험하는 느낌을 법으로 보며,

단지 알아차릴 대상이지 나의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실재를 법으로 알아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 동안 꾸준하게 알아차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수행은 수없이 알아차림을 놓치고 그것을 다시 알아차리는 노력을 할 때

그 과정에서 알아차리는 힘이 쌓입니다이런 시행착오의 시간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관념이나 모양에 휘둘릴 때마다  그랬구나!’ 하고 알아차리고다시 그 순간의 몸으로 돌아와

실재하는 분명한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고정 관념의 그물에 걸리면 바로 자기 생각의 노예가 되어

고정관념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빤냐띠를 중요시하고, 빠라마타를 가볍게 여기는데 이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대부분 관념과 실재를 구분하지 못하고관념을 실재로 착각하여

관념의 그물에 걸리기 때문입니다그래서 괴로움의 뿌리는 무지입니다.